만년필 잡담

 우울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나는 동생에게 줄 마음으로 산 아이팟 터치를 들고 계단에 쭈그려 앉아 두번째 담배를 피고 있었다. 거리는 여름이었고 몹시도 붐볐다. 사람들의 모습이 녹아내리는 버터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폰에서는 마빈 게이의 Sexual Healing이 나오고 있었고, 나는 흥얼흥얼거리며 억지로 기억나지 않는 가사를 따라부르며 걷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톡하고 건드렸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나는 너무 놀라서 그만 꽥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아니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몇달간 좀 쉬기로 해서' '언제 돌아왔어요?' '지난 주? 집에도 연락 안하고 왔어 엄마가 얼마나 놀래던지' '그럴만도 하죠 세상에 연락 좀 하고 살아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랬다 걱정만하고 살면 아깝지않냐' '뭐가 아까워요' '인생? 크크' '아줌마 같은 소리를 하네' '죽을래 아 인사해 이쪽은 나랑 두번째로 친한 친구 J'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똑바로 인사 안할래?'

 방긋방긋 웃는 그녀와는 달리 내 심장은 심하게 쿵쾅거렸고,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나는 그녀의 친구에게 고작 고개만 끄덕거리는 정도의 인사밖에 할 수 없었다.

'근데 여기서 뭐해? 이제 집에 가?' '아뇨 그냥 좀' '밥은 먹었어?' '아뇨 아직' 시간이 몇시인데 밥을 안먹어 하긴 우리도 안먹었지만' '집에가서 먹을까 했지요' '오랜만인데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아뇨 나는 괜찮은데..' '아 저는 괜찮아요' '아뇨 정말' '괜찮다잖아' '정말 괜찮아요' '으하하하 미안해서' '괜찮다니까 야 그나저나 진짜 반갑다 잘 지냈어?'

 그래요. 반가워요. 나도 정말 반가워요. 그래서 우리들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한껏 웃고 이야기를 하며 거리를 걸었다. 여전히 밝고 활기넘치는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어 너무나도 좋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시끄럽다고 생각하든 말든, 큰 소리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렇게 몇 시간동안 넘치듯이 이야기를 하고나서도 하고싶은 말들이 너무나도 많이 남았다는 걸 느꼈지만, 시간이 늦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만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빌어먹을 출근. 

 그녀는 재회의 기념이라며 뭔가를 주고 싶다고 했다. 사양을 해도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아무거나 대충 골라달라고 말을 했고,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만년필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검은색과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PARKER 제의 만년필. 손으로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다 펜촉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손바닥을 쿡쿡 눌렀더니 그녀는 고장내지 말라며 다시 한번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스카 피터슨의 'My Heart Stood Still'을 들으며 폴짝거렸다. 기쁘다. 행복하다. 방금 있었던 일이 마치 꿈만 같기만 하다. 집으로 돌아와 잉크를 넣은 만년필로 그녀의 이름을 열다섯 번이나 쓰고 난 뒤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한번 기뻐했다.

 만약 그녀가 내년에도, 혹은 그 다음 언제라도 이곳을 다시 찾아준다면, 그 해 그녀의 생일에는 그녀가 종종 이야기하던대로 화사한 꽃다발을 선물해야겠다. 재회의 기념으로. 고운 리본을 단 향긋하고 생기넘치는 꽃들을 가득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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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방랑자 2009/07/05 10:22 # 답글

    이야
  • 수- 2009/07/05 11:21 #

    아라는 감탄사쟁이구나.
  • 물빛바람 2009/07/05 11:45 # 답글

    이야
  • 수- 2009/07/05 12:15 #

    Vaio P 이쁘기는 진짜 이쁘더라. 비스타는 너무 싫지만.
  • 4Sqd 2009/07/05 15:02 # 답글

    마빈 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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