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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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10/12/01 02:57 | 트랙백 | 덧글(16)

# by | 2009/10/18 02:23 | 트랙백 | 덧글(0)
# by | 2009/10/13 04:15 |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 by | 2009/09/30 22:47 | 잡담 | 트랙백 | 덧글(5)
# by | 2009/08/30 03:57 |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몇 가지 요소가 아쉽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던 영화. 영화 <독>은 구차하게 몸을 꺾고 기괴한 소리를 내는 원혼의 모습이 아닌 인물간의 심리 묘사와 약간의 오컬트적인 요소들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서서히 죄어오는 공포를 선사한다. 녹슨 물. 배수구에 낀 머리카락. 신의 이름을 부르며 미소 짓는 이웃집 사람들. 이러한 모습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 그들 스스로의 삶에서도 찾아 볼 수 있을 평범한 일상적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낡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어두컴컴한 공간적 구도가 뒤섞이며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무겁고도 묘한 긴장감을 안긴다. 형국(임형국)과 그의 부인 영애(양은용)는 자신들이 저지른 어떠한 행위로부터 벗어나고자 고향집을 정리하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고 그들은 ‘신’에게 기도하며 찬양하는 행위로 자신들의 과거를 보이지 않게 덮어두고자 한다. 마치 장독대 속 내용물이 보이지 않도록 두꺼운 뚜껑을 닫아버리듯이. 하지만 흐름을 멈추고 고인 물은 썩게 되기 마련. 어두컴컴한 독 속에 갇힌 그들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영화의 제목인 <독>은 Poison을 뜻하는 ‘독’이 아닌 Pot. 즉 무엇인가를 담아두는 ‘독’의 용도로 지어졌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Poison의 의미로도 동시에 사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인 감독은, 영화에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보다 정직하고 솔직한 시각에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종교와 초현실적인 문제라는 두 가지 소재를. 굳이 섞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평화로워 보이는 그들의 일상이 무너져가며 파국으로 치닫는, 암울하고도 극단적인 이러한 심리적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조금 아쉽다. 그나저나 포스터 속 여자아이의 섬뜩한 눈빛은 정말 징글맞게 잘 나온 듯. 겁이 많은 친구에게 선물로 줘야겠다.
# by | 2009/08/28 15:31 | 리뷰 | 트랙백 | 덧글(1)
대한민국 영화계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웃음을 짓는다. 언론에서는 천만관객 돌파의 시대라며 한국 영화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은 서로가 입에 침을 튀겨가며 열띤 토론으로 밤을 새워갔다. 잡지는 미친 듯이 팔려나가고 모두가 영화에 빠져있는, 바야흐로 영화계의 황금기. 행복한 비명이 절로 나오는 그런 꿈을, 그들은 여전히 꾸고 있다.
해운대는 그런 달콤한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지독하다 싶은 정도로 평범한 가족주의 영화다. 물론 대기업의 투자를 전폭적으로 받은 이상, 새로운 시도로 도박을 하기 보다는 안전하고도 쉽게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감성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은 여느 상업영화나 마찬가지인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해운대는 그 정도가 심하다. 구차할 정도로 관객들의 마음을 공격하고 공격해서 눈물을 쥐어짜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영화는 크게 ‘쓰나미’라는 재난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모습으로 나누어진다. 대부분의 재난영화에서 그러하듯,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일상은 평온한 배경 속에서 인물들의 소개,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초반부의 흐름은 나쁘지 않다. 만식과 연희. 휘와 유진.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의 모습을 과거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여줌으로서, 관객들에게 각각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갈등을 알려준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 찾고자 했던 신선함보다는, 영화의 진행이 진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이것에 있다. 새로운 한국형 재난 영화라는 말을 듣고 극장을 찾았는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는 이야기다.
영화가 중반으로 들어서며 문제점은 더욱 드러난다. 비극을 보다 격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깔아놓은 다수의 복선들이 바로 그것이다. 인물들은 영화 전반부에서 보여줬던 갈등을 폭발시키며 다양한 마찰을 겪는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기 전 그러한 마찰을 해소시키며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고자 한다. 하지만 너무나 뻔한 소재들로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실망감을 안겨준다. 결국 이 사람은 엄마를 부르짖으며 후회할 것이고, 저 사람은 딸을 껴안으며 사랑한다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장면들을 보고 찡한 무언가를 느끼며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한국형 블록버스터’에게 감탄하게 될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쓰나미가 닥쳐오는 순간 영화는 말 그대로 재난 그 자체가 된다. 영화는 인물들이 죽기 전 구구절절 사연을 쏟아낸 뒤 죽음을 맞게 한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의 도움으로 우연치 않게 목숨을 건진다. 이제 살아남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가족을 껴안고 엉엉 눈물을 쏟으며 죽는다. 한 번에 죽지 않는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이것이 한 인물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다른 곳에서 사건을 맞이하는 또 다른 인물들도 바로 이런 식의 반복되는 구조로 죽음을 맞이한다. 나 죽어요 하고 신파극을 찍어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들더니, 겨우 목숨을 건지고 나서 다시 한 번 슬픔을 부각시키고 죽는다. 같은 장면의 반복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여러 명의 감독들이 각각 비슷한 영화를 찍은 뒤 하나의 큰 영화로 합쳐놓은 듯한 기분이 든다. 영화가 장난이다. 이게 뭐야. 나오려던 눈물도 도로 들어가게 생겼다.
‘우리도 한국형 재난영화를 찍을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댄 해운대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강렬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반복적으로 배치한 신파극을 거대한 쓰나미로 덮어버리며 흥행돌풍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오는 여학생을 보며 이것이 감독이 원한 방식이라면 상업영화로서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면 굳이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조폭코미디랑 비슷하게 만든 뒤 쓰나미를 오게 하면 되는 거잖아. 요점은 부산 해운대에 쓰나미가 덮쳐오는 것이니까.
관객이 곧 천만을 돌파한단다. 한국영화가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려면 아직 한참 멀었나보다.
# by | 2009/08/21 14:19 | 리뷰 | 트랙백 | 덧글(0)
내가 속칭 '부잣집 아들'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그 전까지 난 대부분의 친구들도 정원이 딸린 5층짜리 주택에서 지내고, 저녁식사마다 고기를 먹으며, 수업을 마친 뒤 기사 아저씨가 운전하는 외제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된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내가 또래 아이들과 조금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친구의 집은 무척이나 작았고, 내 방에 몇 대나 있는 게임기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 써왔는지 여기저기 스티커가 붙고 낙서가 새겨진 허름한 책상과 몇 권의 책들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살던 곳은 인천 송림동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형주택이었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두 명의 작은 아버지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당시 할아버지는 인천에 큰 공장과 전문대학을 소유하고 있어서 굉장히 돈이 많았다. 그때 살던 집도 버려진 무덤가를 밀어 세운 학교 옆에, 오랜 시간동안 정성들여 지었다고 들었다. 주변에는 여느 달동네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종종 집으로 찾아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곤 했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 할아버지는 손자인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뭐든지 손에 넣도록 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동네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 내가 받은 선물을 나눠 주곤 했는데, 한번은 밖으로 나와 보니 한 아이가 자신의 동생을 데리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코흘리개 동생 손을 꼭 잡고 있는, 지저분한 차림의 여자아이. 나는 그 아이에게 선물을 주고 아버지의 자동차 위로 올라가 함께 소꿉놀이를 했다. 한참을 재밌게 놀고 있자, 기사아저씨가 나를 찾아 왔고. 나는 지붕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다고 떼를 썼다. 다음날 정원에 앉아 동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기사 아저씨가 담배를 피우다 앞으로는 차 위에서 놀면 못쓴다고 이야기를 했다. 참으로 차분하고 인자한 말투. 하지만 난 얼굴이 확 달아올라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해버렸다.
‘우리 아빠 기사인 주제에’
철없는 어린 아이가 참으로 잔인하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그런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방에서 나가기가 싫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그날 밤 처음 보는 아저씨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빠를 향해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며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는 함께 놀았던 여자애의 아버지였다. 다음 날 거리에서 다시 만난 여자애는 나에게 욕을 하며 내가 준 선물을 집어던졌다.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그 애를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그냥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인지 나는 그 후 곧바로 기사아저씨에게 달려가 엉엉하고 울며 사과를 했고, 아저씨는 괜찮다고 말하며 허허하고 웃었다.
고모의 장례식 때 다시 만난 아저씨는, 어릴 적에 보던 것과는 다르게 나보다도 키가 훨씬 작은 사람이었다. 씁쓸한 미소와 함께 내 머리를 어루만지던 그의 손. 나는 아저씨의 그 손을 꼭 잡고 안부의 인사를 몇 번이고 했다. 잘 지내셨죠. 건강하세요? 그러자 암 투병중이라 고생이라며 그 때와 똑같이 허허하고 웃는 아저씨. 여전히 차분하고 인자한 그의 목소리가, 석양빛에 물든 채 동생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던 어린 남매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 by | 2009/08/07 02:47 |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 by | 2009/07/14 04:24 | 잡담 | 트랙백 | 덧글(4)
# by | 2009/07/05 04:43 | 트랙백 | 덧글(5)
# by | 2009/07/02 11:06 | 이야기 | 트랙백 | 덧글(8)
# by | 2009/06/29 14:57 | 잡담 | 트랙백 | 덧글(1)
# by | 2009/06/26 10:20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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